(公)의 이름은 발(潑)이시니 일찍이 나라 위해 순국(殉國)하는 절개를 품으신 분이다。선조(宣粗) 때에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임진왜란믈 당하매 공훈이 있어서 정난원종 二등공신의 녹권(錄券)을 받으셨다。또 병자호란(丙子胡亂)에도 청병(清兵)들이 갑자기 쳐들어 오매 임금께서 남한산성으로 피난케 되었는데 공께서는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 임금을 보호코저 가려고 하였으나 적군에게 깉이 막혀서 뜻을 이룰 수 없으매 이에 눈물을 홀리면서 칼을 짚고 곧장 전라도로 내려갔다。 병사(兵使)인 김준룡(金俊龍)을 찾아가서 말하기를、『오늘날 임금께서 욕을 당함에 신하는 죽어야 마땅할 때를 맞았으나 원컨대 한 부대의 병력만 내주면 작은 정성을 이룰 수가 있을 것 갈다』고 간청하였다。이에 김병사가 얼굴빛을 고치고 손믈 잡으면서 말하기릍『지금 적의 세력이 크게 창궐한데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지체 되었는데 그대가 고맙게도 와 주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와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하게함이로다』하고 그 날로 북을 쳐서 병사들올 동원하여 밤을 타서 급히 행군하매 때는 깊은 겨울철이라 모진 북풍에 눈비마져 혹심하여 수족이 모두 터졌다。울면서 남한산성을 향하여 군사들에게 이르기를『이제 나라를 위해 충성하자』고 사기를 북돋아 주매 병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한 사람도 뒤처지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수원 광교산(光敎山)으로 진군해 가서 보니 그 때 다른 부대들은 이미 흩어져서 자취가 없고 공만이 홀로 전규(全軍)으로서 크나 큰 적진을 꿰뜷고 나가 남한산성이 서로 바라 보이는 곳에 진을 치게 되었다。낮에는 대포를 쏘고 밤에는 횃불을 들게 하여 남한산성과 서로 호응할 수 있게 하여 수레바퀴와 갈이 서로 돕는 형세를 하였고 때로는 날랜 병사를 풀어서 적을 치고 충돌케 하여 적의 목을 많이 베이매 적병들도 겁을 먹어 감히 가벼히 덤비지 못하였다。 이듬해 정축년(서기 一六三七년) 정월 초 六일에는 적진에서 구름이 낀 날을 이용하여 밀물과 같이 쳐들어 왔다。포성이 산을 울리고 방패와 창이 서로 부딪치고 화살이 바람과 비가 오돗 하매 병사들이 모두 죽어서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공께서는 이에 도끼를 짚고 분발하여 충의를 다할 것을 외치매 모두가 감격하여 포와 화살을 일제히 쏘았다。적들이 쓰러져서 즐비하게 되었으나 마침내는 적이 몰래 뒤의 고개를 넘어 상상봉을 점령당하매 사방으로 포위되어 화살이 비 오듯 하였다。그러나 공께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마지막 힘을 다하여 죽기로서 맹세하고 정병을 뽑아 진격하였다。수백의 화살을 쏘매 하나도 맞지 않음이 없어서 적의 사상자를 많이 내었다。 공께서 활을 잡고 앞에 나서서 힘써 싸워 수백의 적을 무찔렀으나 차차 군사가 줄고 혹은 흩어지는 반면에 적세는 더욱 배나 몰려 내려왔다。그래도 공께서는 홀로 얼굴빛을 변치 않았는데 이 때 좌우에서 화살이 닐아와 공에서는 손가락이 떨어져 피가 홀렀으나 오직 군중(軍中)을 독려하였고 화살이 떨어지고 탄환이 다하매 맨주먹으로 혼자 서서 호령하다가 마침내 돌아가시니(殉節) 위대하고 장하도다。『빠른 바람속의 굳센 풀』이라 함은 정녕 공을 두고 이름이로다。그 후에 광교산의 중이 공의 명패(角牌)를 보고 부고를 알리매 가족이 울며 가서 수시(收屍)케 되었는데 열기(烈氣)가 오히려 늠름하고 얼굴과 눈이 살은 것 갈았으며 입었던 배자(褙子)도 단정한 그대로였다。모셔다가 보령군 青所面 齋洞묘좌 언덕에 장례를 내었도다。 슬프도다 ! 공의 사적이 김병사(金兵使)의 사적(原情) 및 행장록에 밝혀져 있고 또한 공신녹권(功臣錄券)까지 받았으니 그 곧은 충성과 굳센 정신이 저와 같이 높고도 높으나 자손들이 용렬하여 이에 사적이 묻히게 되니 애석하도다。지난 기미년에 진사 이수광(李需光) 등이 현감과 감영에 갈이 글을 올려 임금께 알리고져 기도하였으나 끝내 포상과 증직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 때 선비들의 서명한 것과 전후의 장계(狀啓)가 지금도 자손의 집에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進士 李宜俊 識